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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는 이야기

스타크래프트- 명경기

깐우 2010. 4. 1. 13:55
<이영호 vs 이성은 09년 6월>


<이성은 vs 김재훈>
동영상이 안되서 링크만 걸어놓음
꼭 보았으면 하는 경기

1경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9189521&q=%C0%CC%BC%BA%C0%BA%20vs%20%B1%E8%C0%E7%C8%C6

2경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9190042&q=%C0%CC%BC%BA%C0%BA%20vs%20%B1%E8%C0%E7%C8%C6


<2009년 임진록>




<드라군의 위엄>



<마재윤 전성기>



<전설의 3연벙>

임진록에서 박빙의 전투를 기대했던 3경기가 몇분만에 모두 끝나고 끝나고
(임진록:'임'요환+홍'진'호)

관중석에서 "임요환 개새끼야!!"라는 외침이 들렸다고 함


<강민 선수시절 리콜+할루시네이션>


<콩과 제리>

홍진호는 저글링만 남고 김동현은 뮤탈 두마리
서로 건물 몇개만 남기고 눈치전을 벌이는데...





오유 펌


<스갤 폭파 시나리오, 에피소드 01;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


2009년 광안리. 신한은행 08-09프로리그 결승. 매치업, 공군ACE 대 SKT1.

기인- 백사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늘어선 사람들의 끓는 핏속으로 아드레날린이 한소끔 풀어진다. 환호하는 이, 악을 쓰는 이. 십만 인파들의 눈이 향한 끝 스크린 안으로는 스웜이 퍼지고 사방천지에서 저글링이 몰려든다. 갇힌 마린은 오갈 데를 모른다. 어디를 둘러봐도 누렇게 뜬 스웜뿐이다.

"저 저글링! 저 저글링이 감히 누구의 저글링입니까!"

엄재경의 고함이 좌중을 가르는 가운데 정명훈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신다.

"물론 정명훈! 대저그전 요즘 나아졌습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이 선수 상대로는 택도 없습니다!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이 선수 상대로는 기량이 절정에 달해야 해요!"
"0809시즌 대테란전 승률 78%! 11연승 째! 잡을 테란이 없습니다, 다 죽었어요!"
"동점입니다! 드디어 동점을 만듭니다! 드디어 공군이! SK T1을 ACE 결정전까지 끌고――"

마린의 비명이 타임머신 밖, 저 드넓은 광안리까지 울려퍼진다. 도망치려던 샛길로 다시 스웜이 펼쳐진다. 위아래에선 동시에 저글링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주저앉는 병력을 앞두고 정명훈은 기어이 마우스에서 손을 떼었다. 고개를 숙이는 그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GG.

"마침내 홍진호가!"

자리를 박차며 엄전김이 절규하는 가운데 승자가 일어선다.

"홍진호가 공군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거죠!"

현존 최강의 저그, 폭풍 홍진호가.

타임머신을 열고 나온 그는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밑에서 멍하니 밑을 내려보았다. 천지가 진동하는 함성이 귀를 울린다. 세트 스코어 3:3. 먹먹한 가슴이 한바탕 긴 질주를 마친 것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십만 관중의 터질 듯한 박동과 아우성이 한 데 뒤범벅이 되어 이편을 덮쳤다.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저 많은, 저 우렁찬 함성들!

홍진호!
홍진호!
홍진호!

이름을 불린 그 대단한 남자는 저 먼 관중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목이 메어 채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홍진호는 구호를 뱉는다. 필! 승!

고인규를 잡아냈던 박정석이 저편에서 뛰쳐나온다. 김택용을 무릎 꿇린 차재욱이 가슴 벅차게 진호를 끌어안는다. 임요환에게 아깝게 져버린 오영종도, 도재욱과 엘리전 끝에 패배의 쓴 잔을 마신 한동욱도, 박재혁과 혈투를 벌이다 패한 이주영도 홍진호를 덮쳐 얼싸안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테란으로 홍진호 이기려면 생더블! 초반 피해 아무것도 없이! 홍진호는 선풀 짓고 시작하고! 그러면 이길 가능성이 한! 한 30% 쯤 되는 겁니다!"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버린 엄재경은 연신 각혈처럼 소리를 쳤다.

"그런 존재입니다! 대테란전에서 홍진호는 그런 존재에요! 홍진호가 잠시 주춤하던 시간동안 황신! 우스갯소리로 불렀던 그 별명대로 정말 홍진호는 신입니다! 사람이 테란으로 홍진호 이기려면 자기가 생더블에 홍진호가 선풀 지어줘야 그나마 공정한 거죠!"
"아―― 정말 홍진호 선수, 너무나, 너무나 강력――"

무슨 말을 더 하려던 김태형의 말을 막고 쿠웅! 포성이 울렸다. 공군에서 특별히 대절한 105mm 예포가 세 번째로 불을 뿜었다. 특별히 관람을 허락받은 공군 장병들, 자리에 앉은 장교단은 박수를 치고 힘껏 환호를 했다. 일렬서 떨쳐 일어난 의장대는 악기를 들었다. 승전행진곡이 폭풍처럼 일제히! 우렁차게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홍진호는 떨리는 가슴으로 저편 T1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축 늘어져 들어가는 정명훈 뒤로 최연성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 사람, 임요환이 있다.

"괜찮아."

마른 침을 삼키며 최연성은 그렇게 그의 제자를 다독거렸다.

"괜찮고말고. 어디 진호 형 이기는 게 쉬운 일이냐?"
"죄송합니다, 코치님……"
"글쎄 괜찮다니까 그러네."

명훈은 풀이 죽여 고개를 숙이고, 연성은 애써 웃어보였다. 가슴이 막막하다. 이곳은 광안리, 한때 제국 T1이 제패했던 왕토[王土]. 이제 누가 나가야 이 절망적인 전황을 타파할 수 있을까. 저만치 의자에 앉은 박용운 감독은 얼이 빠진 얼굴로 저 위 텅 빈 무대를 올려보고, 임요환은 아직 말이 없었다.

"그러면 누가 나가겠습니까!"

전용준이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ACE 결정전! 공군은 홍진호입니다! 무조건 홍진호입니다! 그러면 T1은!"
"예, 예, 카드 있죠. T1이라고 홍진호 잡을 카드 없는 거 아닙니다! 임요환 있습니다!"

말을 받은 엄재경은 흥분으로 떨리는 제 손을 확인하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에 고함을 섞어가며 그는 또 포장을 시작하려고 어휘를 골랐다. 임진록. 꿈에도 그려오던 그 이름.

"그렇죠! 임요환 나와야죠! 테란의 재앙이 홍진호라면 임요환 역시 저그의 재앙 아닙니까!?"
"김택용 선수, 물론 잘하죠! 그런데 김택용도 프로토스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홍진호에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홍진호 선수―― 무대 가운데로 와서――"

무대를 걸어 홍진호는 제국 T1의 본진을 다가왔다. 딱 이쪽과 서로를 마주볼 거리만큼만 와서,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임요환을 가리켰다. 삿대질을 당한 요환의 표정이 굳고 거꾸로 홍진호는 웃었다. 탄성이 일었다.

"그렇습니다!"

엄재경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탄식한다.

"임진록 한 번 치르자는 거죠!"

이제 십만 관중은 임요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임요환의 0809시즌 대저그전 승률 82%! 스타리그 4강 진출! 기량을 회복한 이윤열조차 혀를 내두르는 대저그전의 스페셜리스트! T1의 황제! 갖가지 어휘를 희롱하며 황제를 찬양하는 엄재경의 수작질을 들으면서도 임요환은 이를 악물었다. 광안리는 미친듯이 임요환을 연호한다. T1의 팬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부르고, 공군의 팬들 역시 맞수를 찾아 고함쳤다.

임요환!
임요환!
임요환!

광안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호명을 외면하고, 임요환은 무심하게 박용운을 돌아보았다.

"명훈이 내보내시죠."

씹어뱉는 그의 말이 사형선고만큼이나 무서웠다. 최연성은 숨을 삼키고, 정명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푹 의자에 앉았다. 박용운 감독의 얼굴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야, 요환아……"
"명훈이도 진호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명훈아, 할 수 있지?"
"형, 방금 깨진 애 억지로 세워다가 뭘 어쩌려고――"
"연성아, 나 지금 명훈이한테 물었다."

황제의 나직한 입막음에 괴물은 이윽고 입술을 깨물었다. 폐하께옵선 이내 정명훈을 돌아보았다. 시퍼런 눈빛을 마주보던 명훈은 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홍진호 선수 못 잡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고백을 애써 하는데도 임요환은 냉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너 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나가."
"저 저그전 자신 없어요!"
"티원테란이 왜 저그전이 자신 없어 이 병신새끼야!"

머리를 때리는 사자후에 정명훈은 왈칵 울음을 삼켰다. 임요환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당장 나가. 나가서 이기고 돌아와. 정명훈은 대답지 않았다. 그저 한 번, 원망스러운 눈으로 까마득한 대선배를 노려보고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괜찮겠어?"

못내 불안해서 되묻는 박용운 감독의 배려에도 정명훈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은 푹 한숨을 쉬고, 이내 종이에 정명훈의 이름을 휘갈겼다.

이윽고 임요환을 대신하여 정명훈이 무대에 올랐다.

광안리에는 아쉬움과 체념의 아우성이 휩쓸었다. 홍진호는 한 번 멀리 임요환을 노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요환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꾹 아쉬움과 열정을 속으로 눌러 삼키는 와중, 곁에 앉은 최연성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이겨. 6경기서 이겼으면 모를까, 지금은 가망이 없어."
"명색이 티원테란이다."
"쟤 저그전 아직 완성 안 된 거, 형 정말 몰라서 그래?"

타박하는 최연성을 외면한 채 임요환은 턱을 괴어 저편을 올려보았다.

"아직이면 완성될 가망은 있다는 거지?"

엉뚱한 물음에 최연성은 또 웃는다.

"다음에도 광안리 오면 말이지, 한창 물이 올라 있을 거야. 그 때쯤엔."
"어차피 지는 싸움이야. 내가 나가도 그렇고, 코새―― 아니, 택용이가 나가도 가망 없고."

진호 기세가 너무 올랐어. 그 한마디를 씹어뱉고 임요환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저만치서 난감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던 김택용도 이윽고 주저앉고, 최연성은 초탈한 것처럼 의자에 누웠다. 광안리 하늘에는 끝도 없는 서치라이트가 올라 먹구름낀 하늘을 희롱했다. 여름밤답지 않게 바람이 차고 강하다. 바야흐로 광안리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결국 T1은 패배했다. 공군은 광안리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나부끼는 공군 ACE의 깃발이 백사장 한가운데에 꽂혔다. 자리를 함께한 공군참모총장은 유성렬 중위를 비롯한 선수들과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누며 공을 치하했다. 프로리그 최약팀에서 우승까지 도약해온 긴 1년이 끝나는 순간, 선수들은 하나같이 울먹거렸다. 트로피를 들어올린 MVP 홍진호는 젖은 눈으로도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더 높은 곳에서 울겠습니다."

왕왕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아우성에 홍진호는 그렇게 대답했다.

퇴장하는 가운데서 임요환을 설핏 홍진호를 돌아보았다. 나가면서 그도 단 한 마디를 곱씹었다. 더 높은 곳에서. 팀의 이름이 아닌 오로지 우리 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을, 보다 위대한 우승컵을 사이에 두고 싸워야 할 더 높은 곳에서.

다음날, T1의 숙소는 비었다.

프로리그가 끝나자 팀은 오랜만의 휴식에 돌입했다. 김택용의 제안으로 이번 휴양지는 푸켓이 되었다. 개인리그를 치러야 하는 단 세 사람만 남고 T1 선수들은 푸켓으로 향했다. 어차피 양대리그는 각각 4강에 돌입했고, 경기를 준비할 선수들은 온 스타판을 통틀어서 여덟 명밖에 남지 않은 채였다.

그중에서도 T1에서 남은 사람은 프로토스 하나와 테란 둘 뿐이었다. 우선 김택용이 있었다. MSL 4강에서 마재윤과 한판대결을 벌이게 될 그는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었다. 푸켓을 가길 제안해놓고도 정작 그는 정작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다시 프로토스의 재앙이 되어 돌아온 마재윤은 2007년 3월 3일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스타리그 4강에서 맞붙을 두 사람이 더 있다. 임요환과 정명훈은, 이제는 첫 팀킬잔혹사를 벌일 차례였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용산 이스포츠 센터 대기실에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네가――"

먼저 입을 연 건 임요환이었다.

"명훈이 네가 91년생이었지?"
"예."
"이제 열아홉 살이네?"
"예."

맥없이 대꾸하는 정명훈에게 임요환은 한숨을 쉬었다. 어린 친구들이 꽉 잡고 있는 게 이 스타판이란 동네다. 80년생의 백전노장은 고작 서른 줄에 들자마자 부쩍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열아홉 살. 아찔하도록 멀게 느껴지는 나이다. 난 저 나이 때 무얼 했더라.

"반대편 4강전에선 진호가 올라올 거 같다."
"영호는요?"
"영호, 그래, 영호 잘하지. 그런데 진호가 기세가 너무 올랐어. 영호가 막아내기 버거울걸?"

정명훈은 입을 다물었다. 임요환도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누웠다. 이제 홍진호가 뽑아든 칼날은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로 나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결승에 올라가면, 어떻게, 진호 이길 자신 있냐?"

대답도 못하고 정명훈은 꾹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명훈아. 봐줄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내가 올라가마."

정명훈은 울컥 임요환을 마주보았다. 이것 봐라 싶었다. 정말 아찔한 오만함이다. 아량을 베풀어 봐 줄 수도 있었다는 저 자신감이 더할 나위 없이 얄밉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서 더욱이. 0809시즌 임요환의 테테전 승률은 69%. 서지훈이나 이영호만큼의 미친 기량은 아니더라도, 그 우수한 승률에 더하여 이정도 자신감이면 듣는 사람으로서는 소름이 오싹할 밖에 없다.

"거기다, 내가 천년만년 해먹을 것도 아니고 다시 네가 우리 팀 에이스 될 텐데,"
"또 부활하시겠죠?"
"힘들어서 더 못해먹겠다. 이번엔 진호 콩라인으로 남겨두려고 나도 좀 분발해보는 거야."

말끝으로 그는 얼른 정명훈의 머리칼을 헤집어 놓았다.

"이젠 네가 T1 책임져야지. 별명도 국본[國本]이라며?"

국본. 오랜만에도 듣는 그 이름에 비로소 정명훈은 헤죽 웃고 말았다. 별로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었지만 황제 본인으로부터 직접 듣는 국본이란 칭호는 각별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얼른 왕위를 물려주려는 노왕처럼 임요환은 애정을 담뿍 담아 그의 후배를 얼렀다.

"너도 명색이 티원테란이다. 저그전 곧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엔요?"
"아직 아냐. 이번에 네가 올라갔다가 덜컥 진호가 우승이라도 하면, 그땐 준우승라인 이름이 콩라인이 아니라 정명훈라인 돼버릴 걸? 줄이면 훈라인. 어감이 별로잖아."

말끝으로 그들은 체신없이 키득거렸다.

열아홉과 서른. 두 남자가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어야 할 시간이 촌각으로 다가온다. 열아홉이라는 나이를 입 안으로 되뇌다가 이윽고 임요환은 웃었다. 열아홉이면 벌써 어른이고 어엿한 사나이다. 봐준다는 수작은, 물론 농담이었지만 하면 안 될 수작이었다.

"잘 하자."
"네."

둘은 툭, 주먹을 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에선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와 국본을 번갈아 연호하는 소리들. 문을 열자 그와 T1의 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서른의 황제께옵선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깊이 숨을 머금었다. 처음 책봉을 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스타리그,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 까마득한 후배의 경외 어린 반란을 제압해야 할 때가 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다시 숨을 골랐다. 칼을 뽑아들었다. 혈전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군림하고, 통치하며, 또한 승리할 것이다――



<스갤폭발 시나리오, 에피소드 02; 마에스트로 >


"푸켓 안 갔다면서?"

경기장에 나가기 전 복도서 만난 마재윤은, 제일 먼저 그 말부터 꺼냈다.

김택용은 어헣↗ 민망한 웃음을 웃고 말았다. 못내 대답이 궁했다. 오랜만에 다시 뵙는 본좌께옵선 2007년 3월 3일처럼 형형한 눈으로 이편을 보고 있었다. MSL의 왕관은 아직 저 위에 있는데 벌써 그가 길을 가로막는다.

"괜찮아? 아둔의 성지에 안 가도 이길 수 있다는 거야?"
"그 시간에 연습해야지요."

말을 들은 마재윤은 샐죽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2007년 3월 3일에는 달랐단 말이군. 그때는 적당히 푸켓에서 물장구나 치고 와도 이길 수 있었다는 수작이었어.

"임이최마택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라."
"에이, 저는 별로――"
"나는 너 맞먹게 할 생각 없다."

단숨에 말을 끊는 수작에 비로소 김택용은 눈을 들었다. 흐릿하니 의뭉스럽던 눈이 비로소 가늘게 마재윤을 노려봤다. 그러십니까, 하고 입안에서 되뇌는 소리에는 치기에 젖은 열정과 패기가 베었다. 본좌께옵선 정면으로 김택용을 마주보며 으르렁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밟아라."

속삭이는 마에스트로의 목소리는 낮고 장중했다.

"한 번만 더 나 밟고 올라가면, 이젠 정말 네가 본좌다."

0809시즌 마재윤의 대프로토스전 성적 76%. 돌아온 프로토스의 재앙. 8강서 송병구는 격침당했고 그보다 먼저 16강서 도재욱이 짓밟혔다. 이제는 김택용 뿐이다. 정말 단 한 사람, 김택용 뿐―― 그 긴 0809시즌 가운데 CJ와 T1이 몇 번을 맞붙었을진대, 마재윤과 김택용은 이제껏 겨루질 않았다. 양자의 시퍼런 칼날은 아직도 칼집 속에 잠들어 있었다.

"3대0 자신있습니다."
"나도 3대0 자신있다."

한 번 서로 그렇게 이를 악문 두 사람은

단숨에, 떨쳐일어났다.

"여러분, 큰 박수로 이 두 선수를 맞아주십시오!"

고함을 치는 박상현 캐스터는 벌써 자리서 일어나 있었다. 관중들은 홀린 듯 멍하니 입을 열었다. 떨리는 적막은 곧 환호가 되었다. 조명 아래 악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나온다.

"이 두 선수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설명을 더해야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사실 마재윤 선수는――"

얼른 데이터를 살피던 이승원 해설은 말문이 막혔다. 최근 10전 기록 9승 1패. 대프로토스전 최근 10전 기록 10전 전승. 그리고 그 승리의 재물이 된 쩌렁쩌렁한 이름들― 송병구, 도재욱, 윤용태, 김구현, 허영무. 이승원은 곧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다, 프로토스 다 죽였습니다. 본좌 마재윤, 마에스트로 마재윤한테 사그리 전멸당했습니다! 하나도! 단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이제 김택용 선수 하나 뿐입니다! MSL과 스타리그를 통틀어 남은 프로토스는 오직!"

자리에 앉은 마지막 프로토스 김택용은 숨을 몰아쉬었다.

몰아쉬고, 다시 내쉬고. 왕왕 계속되는 해설진의 호들갑에 타임머신이 울린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저편은 프로토스의 재앙, 이편은 프로토스의 희망. 이 빌어먹을 하등종족 프로토스에 남은 지휘자 이름 석 자가 김택용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외로울 수 없다. 마재윤의 지휘봉은 그만큼 전능하다. 16강과 8강을 거쳐, 그 위대한 지휘는 프로토스를 번번이 짓밟았다.

카운트가 내려간다. 파르르 떨리는 CRT 안에서는 프로토스 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번번이 이름만을 부르고 있다. 김택용, 김택용, 김택용―― 마우스를 쥔 김택용의 손에, 반대편서 모니터를 바라보는 마재윤의 안광에 시뻘건 힘줄이 돋았다.

"MSL 4강! 경기!"

휘둘러 헤치는 박상현의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갈랐다.

"시작합니다!"

그리고, 연거푸 네 경기가 치러졌다.

본좌와 혁명가는 치열하게 맞서싸웠다. 엘리전으로 승부가 난 게 한 판. 전진게이트와 9드론 쇼부게임으로 승패가 갈린 게 각각 한 판. 운영싸움은 김택용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스코어는 동점.

이제는 마지막 결전도 절정으로 달린다.

마에스트로께옵서 출격명령을 하달하시고, 일시에 전 미니맵이 시――뻘겋게 물들며――

"몰려듭니다, 몰려듭니다! 마재윤 선수의 전병력, 일시에 출발합니다!"
"그렇죠! 손자병법을 마재윤 선수가 읽었다고 했지요!? 이 선수 영리합니다, 읽은 즉시 느낀 거죠! 이거 써먹어야겠다!"

바야흐로 저그가 가져간 멀티 다섯. 공격해야 할 프로토스의 멀티는 셋! 포톤캐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리버와 템플러가 시퍼런 이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마재윤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는다. 전 병력에 죽음을 명령하는 마에스트로의 명령은 서리처럼 준엄하다. 돌격, 돌격,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격!

"그래서 나왔습니다! 배즉분지[倍則分之]! 내 병력이 두 배면 둘로 나눠서 두 군데 다 치면 됩니다! 어차피 김택용 선수는 병력 둘로 나눌 수 없어요! 히드라! 저글링! 울트라! 럴커!"
"이 병력 잃어도 됩니다! 잃어도 또 나옵니다! 계속 나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나옵니다!"
"쓸어넣고 있습니다! 미니맵 전체가 꿈틀대는 거 보십시오! 마에스트로의 지휘가 비로소!"

한승엽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가운데, 김택용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땅이 떨리고 연신 몸서리를 친다. 몰려오는 저그의 병력이 평원 전체를 짓밟고 부숴놓는다. 워포그에 가린 저 밖으로는 저글링의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점점 가까이, 점점 빠르게. 펼쳐놓은 옵저버는 오버로드에 걸려 연신 터지면서도 몰려오는 저그의 병력을 보도했다. 그리고 기적의 혁명가, 김택용은 그 앞에 섰다. 공포를 이겨내야 했다.

프로토스가 왜 저그한테 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벌써 두 해 전이다. 마재윤도 저그다. 그의 드론이라고 한 번에 미네랄 16씩 캐는 것 아니고, 그의 저그라 해서 인구수 제한이 400인 것 역시 아니다.

"리버 도열!"

갖춘 조합의 토스는 결코 저그가 두렵지 않다.

"스톰 준비!"

저그의 전 병력이 두 번을 거듭 몰려와도 피칠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프로토스의 갖춘 조합이다.

프로토스를 믿는다. 한 번도 본좌를 배출한 적 없는 이 어렵기 짝이 없는 종족을 믿는다. 프로토스도 그를 믿고 있다. 리버! 템플러! 아칸! 두려울 것은 없다! 워포그를 헤치고 뛰쳐나오는 저글링을 보면서 혁명가께옵선 비수를 휘둘러내리셨다. 도열한 리버는 스캐럽을 뿜고, 일시에 스톰이 저글링의 머리 위로 꽂혔다.

단숨에 피바다가 펼쳐진다. 마재윤의 손은 휘둘러 고집스레 돌격명령을 내렸다.

"결국 얼마나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얼마나 피해없이 막아내고, 조합을 깨뜨리지 않은 채로 떨쳐나갈 수 있는지!"
"그렇죠, 프로토스가 갖춘 조합으로 순회공연 시작하면 아무리 마재윤이라도 무섭습니다! 김택용 선수는 이번 한 타를 피해 없이 막고! 회전력이 발휘되기 전에 나가서!"

채 방어병력이 집중되지 못한 프로토스의 두 시 멀티는 불타오른다. 스웜이 펼쳐진 위로 저글링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 저글링이다. 맵이 통째로 기울어진다. 마재윤의 저글링은 생산되는 즉시 그 기울어진 맵을 따라서 터진 봇물처럼 밀려온다.

먼저 다섯시로 몰려온 병력을 밀어내고, 그 즉시 두시로! 김택용의 마음은 급하고 마재윤은 그 시간을 주질 않는다. 저그의 병력은 몰려든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쿠웅! 쿠웅! 비로소 등장한 울트라리스크는 미쳐 날뛰었다. 다시 스웜이 펼쳐졌다. 지켜야 했던 두시 멀티는 진작에 깨졌다. 물론! 마재윤의 저그도 곧 힘이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자원을 써서는 아무리 미친 듯이 미네랄을 쌓아뒀어도 남아나질 않는다. 김택용도 그것을 안다. 아는데! 아는데 그 전에 이편이 통째로 밀려날 판이다!

저그는 이렇지 않다! 저편서 마재윤이 지휘하는 종족이 진정 저그라면 몇 번 꼴아박다가 진작에 지쳐 끝장이 났어야 한다! 지금쯤 프로토스의 병력은 센터를 휘어잡고 달려오는 저그의 병력을 여유롭게 녹여버려야 정상이다! 헌대!

"막아 냈습니다!"

저그의 공격이 비로소 잠시 그친다.

"그 많은 공격을! 한 차례 치열하게!"
"김택용 선수,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어디를 치고 날려버려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김택용의 눈은 시퍼렇게 날이 서 진영을 살폈다. 두시는 날아갔다. 하지만 GG를 칠 상황은 아니라고 믿는다. 다섯시 멀티는 끝끝내 지켜냈고, 여섯시 멀티는 반파되었지만 넥서스만은 무사하다. 뒷심은 아직 남았다. 지킬까, 아니면 밀고 나갈까.

"그래서 이번 한 공격은 정말 마재윤 선수에게 아프게! 비수처럼 꽂혀야만!"

하긴 전부 무익한 고민이다.

어차피 전략을 선택하는 건 이쪽이 아니다. 마에스트로를 상대하는 모든 프로토스는 단지 선택을 강요받을 뿐이다. 마재윤이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지키라고 하면 지켜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승패가 갈릴 뿐, 판을 짜는 것은 오로지 마에스트로 뿐이다. 이번에도 저 워포그 너머에서 마재윤은 김택용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와 보라고.

전부 앞으로!

제 병력에게 고함치며 김택용은 비수를 꼬나쥐었다. 그의 눈은 병력의 앞을 쫓고 옵저버를 뿌렸다. 맵 안으로 스스로의 시야를 쑤셔넣어 그는 부감의 풍경이 아닌 유닛의 하나가 되었다. 혁명가의 프로토스는 단숨에 전장을 달려나갔다.

"김택용 선수 이제 어디 칩니까! 여덟시!?"

광할한 센터에서 김택용의 비수는 잠시 멈칫했다.

"아홉시!? 열두시!?"

쳐야 할 멀티가 시커먼 워포그 너머 다섯 군데이다. 그런데도 병력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이 하등종족 프로토스의 한계이다. 갖춘 프로토스의 병력은 언제나 한 덩이, 단 한 덩이여야만 한다. 흩어지는 순간 조합은 깨지고 축차투입과 소모의 반복이 계속된다.

상대는 마에스트로. 전장의 지휘자. 프로토스의 병력이 센터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꾸미고 있을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김택용은 떨고 있었다.

어디 한 군데로는 반드시 달려야 한다. 그는 이윽고 돌격을 명령했다.

"김택용 선수! 여덟시 앞마당으로 달립니다!"
"어어!? 어어!? 김택용 선수, 거기, 거기는――"

방어선이 얇다. 선택은 탁월했다! 스톰을 연달아 꽂고 드라군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럴커 라인은 순식간에 피바다로 화했다. 성큰 하나는 밀려드는 질럿 앞에선 풍전등화이다. 막혔던 숨이 확 트여서, 김택용은 비로소 웃고 말았다. 순회공연 시작이다. 다음은 아홉시――

"거기는 사지[死地]인데요!"

그리고 김택용만을 바라보던 모든 프로토스의 숨이 멈췄다.

입구에 걸렸던 옵저버가 터진다. 스컬지 하나가 와서 부딪히고, 그 뒤로 군집한 저그의 병력이 일순 드러났다. 그것들이 진군한다. 맵이 다시 기울어진다. 맙소사.

그리고 비로소 김택용은 이곳이 사지였음을 알아챘다.

사방이 막혔다. 탈출하려면 좁은 입구뿐인데, 입구 앞에는 럴커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저글링이 꾸역꾸역 불어나고 구름처럼 몰려든다. 마재윤의 멀티를 깼다. 마에스트로의 한 팔을 끊었다. 그런데 아니다. 이제는 이쪽이 갇혔다.

함정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도 마에스트로의 손바닥 위였다. 잠시 쓰게 남은 수를 곱씹던 김택용은 이윽고 때려 부술 듯 어택 키를 박아넣었다.

총공격!

본진에서 나온 추가병력! 멀티를 깬 잔여병력! 사그리 모아서 총출동! 리버의 스캐럽이 좁은 입구를 날고 몰려오던 히드라와 저글링을 사그리 찢어버린다. 펼쳐지는 스웜을 아랑곳않고 질럿들은 미쳐 날뛰었다. 스톰이 꽂히기 시작했다. 비로소 프로토스는, 저그를 상대할 때 선보일 수 있는 전부를 내보였다.

"여러분들은 왜 프로토스를 시작하십니까?" 최소한 김택용, 그는 하드코어 질럿 러시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좋았다. 더하여, 이 어려운 종족 전부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 종족으로 최고에 올라보고 싶었다. 그리고 최고에 올랐다.

그런데도 마에스트로는――

"잘 싸웁니다! 잘 싸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김택용 선수가 전투만 잘 해 준다면!"
"마재윤 선수, 스웜 부지런히 펼쳐야지요! 아칸이라고 스웜 안에서 무적인 거 아니거든요!"
"디파일러 옵니다! 디파일러 옵니다! 설마! 설마 플레이그!"

마에스트로가 이끄는 제4종족 Savior는,

이렇게 되살아나, 치열하게 복수해 온다.

플레이그가 시뻘겋게 뿌려졌다. 싸우던 질럿들, 리버, 전부 체력이 바닥나고 터지고 스러진다. 맞서싸우던 아칸도 쓰러졌다. 추가병력은 축차투입, 소모 이상의 의미가 없다. 꼴아박히고 그냥 그렇게 주저앉았다. 140을 찍던 인구수가 100으로 떨어지고, 다시 60이 된다.

비로소 그 혁명가는 눈을 들어 부스 저편을 바라보았다.

김택용은 더 이상 떨지 않는다. 남은 자원도 지휘할 병력도 없어 손도 바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멍하니 마재윤을 바라보는데, 오히려 승기를 잡은 마재윤의 눈이 젖고 충혈되어 있었다. 본좌의 어깨가 흐느끼듯 떨고 있었다. 주[Savior]여, 거장[Maestro]이시여, 왜 이기고도 그리 우시나이까. 잠시 아연하게 그편을 보던 김택용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화면으로 패배를 시인하는 두 글자가 출력되었다.

GG.

그것을 본 마재윤은 홀린 듯 일어나 부스를 나왔다.

헤드폰을 벗자 잠시 귀가 먹었다. 연신 무어라 고함치는 해설진의 소리도, 뛰쳐일어서 환호하는 팬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패배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지가 오래였다. 그토록 맛보지 못했다가 기어이 삼키는 승리의 쓰고 달콤한 향기는, 차츰 그의 혀를 마비시키고 코를 맵게 만들었다.

마재윤!

환호하는 팬들에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들지 못했다. 어깨의 떨림은 멎을 줄 모르고, 젖어만 있던 눈도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재윤!

우레처럼 울리는 그의 이름은 스튜디오를 뒤흔든다. 해설진들은 말릴 생각도 못한다. 오히려 그들 역시 마재윤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마재윤. 그의 별명은 마에스트로. 막장이니 쓰레기니 찍고 까불던 더러운 수작들을 전부 헤쳐버리고 이제 본좌께옵선 다시 결승에 오른다. 스타판의 천재 이윤열을 맞아 싸우러 간다. 두 해 동안이나 그를 믿고 기다려준 팬들, 지기만 하는 그가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던 옛 팬들 모두에게 고개를 숙인다. 팬들은 박수를 친다. 환호를 보낸다.

그들의 사랑하옵는 마에스트로께선 아직, 이토록 생생하게 군림하고 계신다.

<스갤폭발 시나리오, 에피소드 03; 전설과 신화>


"며칠동안 연습을 하는데요――"

한참을 말이 없이 앉았던 윤열은 문득 그렇게 운을 떼었다.

"자신이 없더라구요. 질 것 같았어요. 재윤이가 너무 잘해서요."

진짜루요. 거듭 그렇게 말을 하는 그는 잠시 후면 MSL 결승전을 치를 테란의 천재 이윤열이다. 지는 것이 어색하고 이기기가 어렵지 않아 이번 시즌 그의 승률은 트리플 70%를 가볍게 넘고 80%를 앞뒀다. 그런 이윤열이 결승전에 나서면서도 자신이 없다는데―― 김양중 감독은 이를 도대체 어떻게 격려해야 할지 난감했다.

"네가 재윤이보다 훨씬 잘 해."
"아니에요. 저번 결승서도 졌잖아요. 커맨드도 먹히고."
"긴장해서 그랬었지. 신한 마스터즈선 이겼잖아.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긴장하는 것은 김양중 뿐이었다. 윤열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신경 쓰여서 고민해봤어요. 그런 류의 저그, 해법 찾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떨쳐 일어섰다.

문을 나서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아찔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까마득한 십년 전부터 그를 응원하던 목소리가 시간을 넘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이윤열. 그 이름 석 자만으로 이 재주 있는 남자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휘어잡아 십년 여를 열광케 만든다. 이제 열흘째를 맞는 붉은 꽃은, 아직도 붉은 채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희롱한다.

"드디어 입장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을 가르는 반대편에선 마재윤이 들어오고 있다. 2007년의 어느 춥던 봄날처럼, 이제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발견하자마자 새파랗게 날이 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김철민 캐스터의 고함이 아우성과 침묵을 일시에 가른다.

"MSL을 정복하기 위해 등장하는 이 대단한 선수들을, 여러분, 박수와! 환호로!"

그러나 이미 더 나올 환호가 없었다. 더할 박수도 없었다. 경기장은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이 가득 차 들끓고, 무대로 나아가는 두 선수의 모습을 좇아 열광했다.

무대에 오른 이윤열과 마재윤은 서로 말이 없었다. 둘 다 서로가 트릿했다. 이윤열은 2007년 결승의 악몽을 곱씹었고, 마재윤은 십년을 두고 해 처먹은 이 징그러운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서 다시 결승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이다. 그 십년동안 은퇴를 한 사람이 몇이고 퇴물로 주저앉은 사람이 몇인데, 이윤열, 이 한사람만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

"저는――"

결승의 각오를 묻는 김철민의 닥달에 이윤열은 그렇게 말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는 전설로 남고 싶――습니다."

또 싶습셒습 얘기가 나올까봐 저어해서 일부러 발음에 정성을 들인다. 이번엔 제법 잘 되긴 했는데, 또 부러 신경을 쓰는 모습이 우스운지 관중들 사이에서는 와아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말을 한 이윤열도 쑥쓰러워 헤죽 웃고 말았다.

"한 번 이 얘기를 했는데, 그 때는 못했습니다. 이번엔 꼭 전설이 되고 싶습니다."

말을 듣는 다른 한 사람, 마재윤만은 감히 웃지 못했다.

이제는 저 말이 우습게 들리지가 않았다. 본좌 마재윤도 나이가 들었다. 십년을 해먹은 저 이윤열이라는 사람의 피나는 노력과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볼 만치는 되었다. 한 번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이제는 안다.

"마재윤 선수?"
"경기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거듭 묻는 김철민 캐스터에게 마재윤은 이를 악물었다. 할 말을 경기로 갈음하여, 나를 향한 모든 의문과 도전을 쓸어 없애겠나이다―― 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 그의 눈이 장중을 둘러보자 그의 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마재윤은 비로소 약속한 칼을 뽑아들었다.

악몽 같은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해 세월을 넘어 망령처럼 되살아난 이윤열이 마재윤을 기어이 압도하고야 말았다. 불꽃 러쉬로 시작된 이윤열의 저그전은 마재윤의 심장에 푹 푹 박혔다. 마재윤은 어이 없게 한 판을 지고 다시 한 판을 이윤열에게 허락했다. 스코어는 2대 0. 어게인 2월 24일을 약속해놓고, 거꾸로 3월 3일의 악몽의 기로에 선 마재윤은 등골이 오싹했다.

죽은 이윤열이 산 마재윤을!

"이윤열 선수, 다시 라인을 긋기 시작합니다!"

맵 한가운데로 거대한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다. 마린, 메딕, 탱크―― 더하여 서플라이 디포로 두텁게 다져진 라인은 바야흐로 맵을 반으로 가르며 마재윤에게 반반 싸움을 강요하고 있었다. 마우스를 틀어쥔 마재윤은 이를 갈았다.

"저거, 저거 뚫어야 합니다, 마재윤 선수. 저거에 세 경기를 내리 당할 수는 없습니다!"
"김택용 선수를 이겼는데요! 최악의 천적 김택용을 이겨놓고! 마재윤 선수, 여기서 설마!"

마재윤이 몰아칠 여지도 주지 않고, 그 지휘가 맵을 뒤흔들 틈도 주지 않고. 이윤열은 축성을 하고 있었다. 싸우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길목마다를 틀어막고 시나브로 다가오는 테란의 진영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다. 달려드는 저그에게 손해를 강요하고 있다.

마재윤이 손자병법을 들고 나오자 이윤열은 그 앞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들이밀고 있었다. 공격을 하는 측은 보다 먼저 지치고, 먼저 나가떨어진다. 압도적인 승리 없이 시간이 흐르게 되면 양측의 전력이 역전되는 시점― 한계정점이 도래한다. 마재윤은 질 것이다. 맵의 반은 이미 천재 이윤열의 것이고, 그의 천리장성은 점차 전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마녀는 말합니다! 저기 저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너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재윤 선수, 여기까지 불패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현학적인 목소리로 서사시를 읊는 이승원의 목소리는 점차 떨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때가 온 겁니다! 이윤열이 저기 저 성! 철의 장막을 들고 옮기고 있습니다!"

마재윤의 무덤이 이곳에 마련되었다.

이윤열의 철의 장막은 다시 한 걸음을 나와 드리웠다. 값싼 서플라이 디포가 제차 길목마다 자리잡아 진입로를 틀어막고, 도열한 마린과 탱크들이 전진하여 자리를 잡았다. 다섯 시 멀티가 삽시간에 탱크의 포격권에 다가들었다. 가스체취소에 포격이 떨어지면서, 마재윤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그의 종족은 굶주리고 있다.

"뚫어야지요, 뚫어야 합니다! 기다리면 주저앉을 뿐입니다!"

자원에, 피에, 승리에 굶주렸다.

제4종족 Savior는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승리를 장담했던 마에스트로는 이제 전진밖에 할 도리가 없다. 칼집에 꽂았던 칼을 뽑아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본좌 마재윤은 정점을 찍었던 병력을 끌어모았다. 울크라리스크, 저글링, 럴커, 히드라리스크, 디파일러가 삽시간에 센터 길목으로 군집했다.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단숨에! 지치지도 않고 저 철의 장막을 찢어버려야만!"

목숨을 내놓아라.

그렇게 되뇌며 마재윤은 틀어쥔 지휘봉을 떨었다. 전부 저기 가서 죽어라.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서 죽으면 그로 족하다. 너희의 목숨을 마에스트로가 원한다. 너희의 죽음을 본좌 마재윤이 기억할 것이다. 견적필살[見敵必殺]! 견적필살!

군집하는 마재윤의 병력이 워포그 안으로 선뜻선뜻 스친다. 그 거친 해일의 앞에서, 천재 이윤열은 눈을 시퍼렇게 떴다. 칼을 틀어쥐는 그의 손에는 떨림이 없었다.

"탱크 불어난 것 보십시오, 저거! 저거 게임 시작하고 나서 계속 쌓인 거란 말입니다!"
"마재윤 선수 저 탱크 놔두고는 이 라인 못 뚫어요, 이 라인 뚫으려면! 저 탱크를 어떻게!"

마재윤의 명석한 머리는 해법을 찾고자 골몰한다.

결국 피로 길을 열고, 시체를 쏟아부어 해자를 메우는 말도 안 되는 수작밖에 없다. 스웜을 일시에 드리우고 길목을 들이쳐 바이오닉 병력을 사그리 녹여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압도적인 화력을 보전한 채 탱크까지 통채로 짓밟아야――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 그래야 저 천리장성을 뚫어낸 의미가 있다.

마에스트로의 디파일러는 전능하다. 더하여 그의 병력은 막강하다. 해낼 수 있다. 이를 악문 마재윤은 지휘봉을 휘둘러 내렸다. 그가 지휘하는 장중한 레퀴엠이 시작되었다.

"시작합니다, 시작합니다, 시작합니다! 마재윤 선수! 드디어 일제돌격을 개시합니다!"
"스웜! 그렇죠! 저 한 발 앞선 스웜이야말로 본좌 마재윤의 트레이드 마크 아닙니까!"
"단숨에 뚫어내야 합니다, 더 기다려서야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밖에 없습니다! 단숨에!"

늘어선 탱크의 포구들이 일시에 불을 뿜었다. 사방천지로 진동하는 포성에 귀가 멀고 눈이 아찔했다. 스웜 아래 마린의 화력이 삽시간에 무력화되고, 불타는 서플라이 디포들에 달려드는 저글링들은 포격으로 녹아나기를 반복한다. 소모전, 소모전, 소모전!

피바다를 지나 울트라리스크가 전면에 비로소 나섰다. 막대한 병력을 부어넣으며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접근조차 못하던 저 철의 장막에 맞서는 것을 허락받았다. 모든 업그레이드를 마친 저그의 최종병기는 괴성을 지르며 어금니를 횡으로 그었다. 쿠웅!

"SCV! SCV 달려나옵니다! 역시 영리합니다, 이윤열! 서플 수리하면서 농성하겠다는 거죠!"
"탱크 포격! 마재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정 급하다면, 저글링 몇 기 컨슘해버리고!"

그만큼 급했다. 숨이 멎을 만큼 금했다. 마재윤은 혀를 깨문 채 컨슘을 명령했다. 다시 저글링 몇이 핏덩이로 화했다. 마나가 차오르기가 무섭게 디파일러는 전선을 치고 나왔다. 일순 서플라이 위로 시뻘건 것이 흩뿌려지자 그 광경을 보던 해설진들은 홀린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본좌 마재윤의 기가 막힌 해답에 경탄하며 함께 절규했다.

"플레이그 뿌려집니다! 플레이그를 서플라이에!"

시뻘건 플레이그가 묻은 서플라이 디포의 내구도는 시시각각 바닥으로 치닫는다. 수리를 위해 달려왔던 이윤열의 SCV들은 가볍게 체념하고 기지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 건재한 스웜 위로 제차 스웜이 덧씌워졌다. 장성은 무너지기를 앞두었고, 뒤에 도열한 테란의 병력들은 물러서는 일 없이 포격과 총격을 거듭했다.

그리고 길이 열렸다.

서플라이가 무너지고 마재윤의 병력은 그 앞에 섰다. 마린의 총격은 스웜 안에선 무력하다. 비록 탱크의 작렬하는 포격이 울트라리스크에 직격하고는 있지만 감당할 수 있다. 저그는 본래 아군의 시체를 밟고 전진하며 들이치는 종족이다. 전 인구수의 반절을 쏟아붓더라도 뚫으면 성공이다. 뚫기만 하량이면!

돌격! 돌격!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돌격! 본좌 마재윤, 마에스트로는 다시 맵을 통째로 기울여 생산된 병력을 그 좁은 틈으로 쏟아붓기 시작한다. 천리장성을 무너뜨린 제4종족 Savior의 자랑스런 울트라리스크는 비로소 테란의 병력 앞에 섰다.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메딕! 메딕이!"

해설진은 부르짖고,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벌렸다.

"메딕이 길을 막습니다! 기껏 서플라이를 뚫어놓고! 메딕이!"
"메딕 홀드! 메딕 홀드의! 메딕 홀드의 압박!"

스크럼을 짠 메딕들이 굳게 버티어 장성을 쌓고, 저그의 돌진을 통째로 가로막는다. 멎어버린 마재윤의 병력 위로 구름처럼 모인 배슬들이 이레디에이트의 폭풍우를 쏟아냈다. 울트라리스크마다, 디파일러마다 꽂히는 이레디에이트는 주위 저글링들을 녹여내고 제4종족의 자랑스런 본대를 초토화시킨다.

무너지지 않은 천리장성의 너머에서 시즈탱크들의 포격이 다시 작렬한다. 스웜을 뚫고 내리꽂히는 광역포격이 마재윤의 칼날을 쪼아낸다. 저그의 인구수는 곤두박질치고, 거듭 깎여나가기를 포격마다 갈음한다.

"녹습니다! 전부 녹아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빼야죠, 빼야 하는데!"
"사실 뺀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마재윤 선수는! 이걸 뚫어내야 어떻게!"

기어이 마에스트로의 대군이 회군을 개시한다.

곤두박질 친 인구수는 다시 찰 기미가 없다. 이레디에이트가 너무도 많이, 쏘는 족족 꽂혀서 회군을 하는 동안에도 병력은 계속 줄어든다. 부대끼다가 죽고, 녹고, 피와 시체로 진군의 길을 열려던 Savior의 대군은 이제 피칠갑이 된 길을 따라 후퇴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윤열의 탱크라인이 비로소 지지대를 들어버린다.

천재의 본대는 진격을 개시한다. 스크럼을 짰던 메딕들도 이제는 마린에 섞여 나아가기 시작한다. 스웜을 지나고 와중에 초토화된 다섯시 멀티를 무시하여,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마재윤의 왕좌로 나아간다. 마에스트로가 신음하고 있는 저 너머 본진으로 다가든다. 다시 지지대를 박는 탱크들은 울트라! 히드라! 럴커! 저그의 그 어떤 화력과 기량을 동원해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천리장성이 되었다.

또 SCV들이 몰려나온다. 그것들이 마재윤의, 본좌 마재윤의 본진 코앞에 서플라이 디포와 벙커를 겹겹이 짓고 있다. 몇 걸음을 나온 철의 장막은 다시 장성이 되어 내려앉는다.

"마재윤! 마에스트로 마재윤이!"

절규하는 김철민 캐스터의 목소리를 따라 마재윤의 팬들은 우르르 일어섰다. 홀린 사람처럼 스크린을 바라본다. 카메라가 비춘 마재윤의 낯빛은 어둡다. 뱉고 싶은 통곡을 차마 뱉지 못하고, 그의 얼굴은 짙은 흙빛으로 변해 떨고 있다.

"한때 가볍게 꺾었던 이윤열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이윤열이 산 마재윤을 대뜸 짓밟고저, 저 거대한 기갑집단군과 기계화보병들을 이끌고 밀어닥치고 있다. 얼굴을 감싼 채 마재윤은 여기저기 포격이 떨어지는 본진을 바라보았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병력을 보았다.

돌격을 명령하는 마재윤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그의 병력은 명령을 따랐다. 불꽃처럼 타오르고 싶어서 거침없이 저 막강한 탱크라인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재윤의 팬들을 따라 이윤열의 팬들 역시 일어났다. 경기장에 모인 모든 관중이 일어나, 전능한 마에스트로의 병력이 허무하게 스러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스웜이 겹겹이 펼쳐지고, 그것을 사그리 무시해 버린 채 탱크의 포격이 떨어진다. 돌진하는 마재윤의 울트라리스크는 서플라이 디포 앞에서 주저앉는다.

그걸로 끝이다. 더는 없다.

힘들이지도 않고 앞에 다가온 이윤열은 마재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마에스트로가 손에 쥔 지휘봉을 뺏고, 가볍게 그것을 꺾어버린 이윤열은 제가 뽑은 총구를 마재윤의 숨통에 들이댔다. 마재윤은 고개를 저었다. 키보드로 내리는 손길이 이윽고 주저앉았다.

"이윤열이!"

천재 이윤열이, 두 번째 본좌가, 그를 밀어낸 최연성마저 플레잉 코치로 물러난 이 마당에, 기적처럼 재기하여 다시 자리에 오른 그가!

"마에스트로 마재윤을! 마침내!"

마재윤의 패배 시인이 화면에 출력되는 순간, 김철민의 말은 멎고 대신 관중들의 환호가 해일처럼 들고 일어났다. 쏟아지는 박수와 연호 속에서 이윤열은 부스를 열고 나왔다. 잠시 멍한 얼굴로 죽 관중을 둘러보던 그는 이윽고 활짝 웃었다.

아직 마이크도 들이대지 않았는데도 그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이윤열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환호할 준비가 되었다. 십년의 세월을 넘어, 산 전설이 되어! 다시 이 자리에 군림한 원숙한 천재에게 관중들은 미친 듯 박수를 쳤다.

"제가――"

비로소 다가온 마이크에 고개를 숙이고 이윤열은 젖은 눈으로 웃었다.

"제가 전설이 된다고 했지요?"

그의 양대리그 통산 일곱 번째 우승이었다.

전 스타판은 환호하고 경배해 마지않았다. 돌아온 천재의 기량은 그토록 전능했다. 뒤따라 부스를 나온 마재윤은 설핏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윤열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윤열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확, 마재윤을 굳게 안아 버렸다.

다음에도 결승에서 만나자. 귓가로 그렇게 속삭이는 천재 이윤열에게 마본좌께옵선 키득 웃고야 말았다. 그렇게 전설은, 기어코 신화가 되었다.


스갤폭발 시나리오, 에피소드 04; 폭풍 [完]




"첫사랑이었어."

옆에 앉은 민에게 진호는 문득 그런 말을 뱉었다.

"나한텐 저게, 저 트로피가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파아란 눈으로 그 위, 무대 높은 곳에 놓인 트로피를 본다.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저 한 아름의 쇳덩어리. 기백의 프로게이머들을 홀리는 우승의 명예는 씁쓸할 뿐 아니라 참을 수 없이 달콤하다. 한때 저 트로피를 거머쥐어본 경험이 있는 강민은, 저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정작 차지해 보면 별거 아닌데."
"요환이 형도 그 소리 하더라. 놀리자는 수작이야, 그건."
"그래, 가서 우승해버려."
"이번에야말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진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이 섰다.

"이번에야말로 저 도도한 여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야지."

승리를 주관하는 여신 니케는 아직 누구에게도 웃어주지 않으신다.

새초롬 보일듯 말듯한 미소만 지으시며 여신께옵선 트로피 위에 앉아 양편을 번갈아 보고 계셨다. 더 지켜보실 작정인 양. 그 와중에 황제 임요환이 입장하고 있었다. 십년 세월을 넘어 그가 책봉을 받은 왕토에 돌아왔다. 왕의 귀환을 맞는 니케의 금빛 날개는 활개를 치고, 십만 인파의 환호성은 밀물처럼 무대에 몰려들었다.

"그러면 임요환 선수에 이어서! 돌아온 폭풍!"

전용준 캐스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장중을 울렸다.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거머쥐려 군림한 무관의 제왕을! 여러분!"

얼른 일어서려는 홍진호를 도로 주저앉히고 강민은 툭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 해라, 하고. 폭풍 홍진호는 친구의 격려에 대답도 없이, 샐죽 웃음을 머금은 채 마침내 떨쳐 일어났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시에 휘몰아쳤다.

"큰 박수와! 환호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키 작은 일등병은 오랜 한이 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가슴에 맺혀 사라지지 않는 한이 있다.

한 번도 저 위, 결승전서 승리해보지 않은 홍진호의 저그는 울음을 꾹 눌러 삼키고 고고하게 버텨왔다. 온갖 조롱도 협잡도 참고 견디며 마침내 돌아왔다. 그를 잊지 않던 십만의 팬들과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폭풍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박수는 그래서 이토록 환희에 넘치고 장엄하다.

무대에 오른 홍진호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마이크가 다가왔다.
"꼭 우승하고 싶죠."

각오를 묻는 전용준에게 진호는 그렇게 답했다.

"아뇨, 우승하고야 말겠습니다."

듣던 임요환은 말도 없이 샐죽 웃었다. 코카콜라배 스타리그 2001, KPGA 투어 1차, 그때는 설마 우승하고 싶지 않아서 준우승에 주저앉았을까. 전부 모르는 수작이다. 전승준을 벌써 두 번이나 해먹은 홍진호에게는 특히나.

"우승자는 하늘이 내신다지요."

자기에게 돌아온 마이크에 대고 임요환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모르긴 몰라도, 승리의 여신은 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도끼눈을 뜬 홍진호는 설핏 임요환을 노려보았다. 그 헌칠한 서른 살의 황제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임요환의 뒤에선, 십년을 짝사랑해온 승리의 여신 니케께옵선 진호를 보며 비로소 예쁘게 웃으신다. 자길 믿으라는 양. 진호는 이윽고 몇 마디를 으르렁거렸다.

"해 봐야 알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임요환은 비로소 마주 이를 드러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거든."

그리고 둘은 칼을 뽑았다.

하늘에는 낮게 구름이 끼고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경기장을 채운 십만 인파들의 고동이 빨라지고 거친 박동마다 끓는 피가 몸을 감돌았다. 경기 준비가 끝났다. 종족 선택이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테란을 고르고, 폭풍은 저그를 선택했다. 그들을 따르는 그들의 종족도 진군의 준비를 마쳤다. 전용준이 일어서고 관중들은 숨을 삼켰다.

"그러면 최고를 지향하는 삼성! 삼성전자배 스타리그! 임요환대 홍진호, 홍진호대 임요환!"

이스포츠를 휘어잡는 최고의 캐스터는 비로소 임진록을 선언했다. 결승!

"시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긴―― 샤우팅을 따라 사람들은 일어선다. 채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미리 박수를 친다. 환호를 한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이름을 연신 외친다. 들고 일어나는 목소리는 십만의 목청이 뿜고 백만의 피가 끓는 소리다. 스타판을 잊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직장에 들어가 임진록의 추억을 곱씹던 사람들도 이곳을 본다, 이곳에 왔다. 임진록이 다시 열렸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축제와 같은 전쟁은 시작되었다.

첫 경기는 임요환의 날카로운 벙커링으로 끝이 났다.

들고 일어나는 홍진호의 팬들은 당장이라도 무대에 올라가서 임요환을 때려눕힐 기세였다. "임요환 이 개새끼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홍진호의 팬 가운데서 쏟아졌다. 해설진은 뒤집어지고 관중들은 아우성쳤지만 홍진호는 침착했다. 그의 눈엔 새파랗게 날이 섰다.

다음 경기는 불꽃러쉬. 변길섭의 망령이 되살아나 맵을 휩쓸었다. 십여분만에 기지를 뛰쳐나온 임요환의 바이오닉은 성큰 일곱을 단숨에 뚫어버렸다. 크립을 짓밟고 헤쳐나가는 마린들의 위로, 임요환의 지휘봉은 맵을 가지고 놀았다. 다시 황제가 승리했다.

장중을 휩쓰는 삼연벙의 악몽을 외면한 채 니케는 활개를 쳐올려 홍진호의 옆에 섰다. 십 년 동안이나 자신만을 바라온 그 재주 있는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자, 이제 이겨야지?

그리고 사상 최고의 리버스 스윕이 시작되었다.

"홍진호 선수, 간도 큽니다! 밀리는 상황에서 이런 승부수를 쓰다니요!"

저글링 쇼부를 친 홍진호는 그렇게 황제를 제압한다. 한 판을 따라잡고, 이제 다음 경기.

"이걸, 아니 무슨 이걸 잡아내나요!? 무슨 뮤탈이 캐리어도 아니고!"
"예, 예, 그렇습니다, 사실! 사실 뮤탈 하면 소싯적 홍진호였거든요!"

아무렴! 슬럼프 때야 콩탈 소리를 들었지, 어디 전성기적 그의 뮤탈 컨트롤에 흠을 잡는 자가 감히 있었던가! 임요환의 바이오닉을 희롱하는 홍진호의 뮤탈은 언덕을 거듭 돌고 추가병력을 끊어먹기를 거듭한다. 이를 악문 임요환은 베슬을 기다렸다. 그때까지 걸리는 수십 초가 흡사 영원처럼 길었다. 배럭까지 치받아온 뮤탈들은 이윽고 온 병력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배럭은 기어코 멎어버렸다.

와중 스타포트에선 드디어 뮤탈리스크의 천적이 등장한다.

"베슬 나옵니다! 임요환 선수, 드디어!"
"이레디 개발 됐나요!? 개발 됐나요!?"
"예, 아까, 아까 퍼실리티 반짝거리다가 멎었으니까――"
"됐으면!"

김태형은 흥분으로 그답지 않게 고함을 쳤다.

"됐으면 꽂아넣어야죠, 꽂아서 박살내야죠! 단숨에! 사그리!"

베슬을 보자마자 뮤탈리스크는 날개를 접고 임요환의 본진을 비잉 선회했다. 합치면 족히 수십 목숨을 빼앗았을 그 가공할 괴물들은 워포그 너머로 사라졌다. 활공하던 사이언스 베슬이 멍하니 멈춰선 순간, 반대편에선 스컬지가 등장한다. 그대로 베슬에 들이받는다. 쿠웅!

"임요환!"

엄전김이 놀라 뛰쳐일어나고, 임요환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

"첫 베슬 잃으면! 이런 식으로 잃으면!"

그리고 워포그 너머선 뮤탈리스크가 다시 날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두 번째 뮤탈리스크 부대가 옆을 치고 들어왔다. 두 자루 칼을 뽑아든 홍진호는 힘든 기색도 없이 휘둘러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부대의 뮤탈리스크를 정교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이치고 빼며 그는 다시금 테란의 진영을 유린했다. 두 배의 병력을 거듭해 네 배의 속도로.

"어어!? 두 부대!? 두 부대로 컨트롤을!?"
"아니, 이거 참, 무슨 홍진호는 팔이 네 개 달렸나요?"

불타는 터렛을 내려보며 엄재경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마우스 두 개로 컨트롤 하는 겁니까, 지금?"

앞마당으로 도망치는 SCV들을 뮤탈들은 집요하게 쫓았다. 마린은 모일 틈이 없었다. GG를 때려박아 버리고 임요환은 눈을 치떴다. 쉴 틈도 없이, 폐하께옵선 이를 악물고 다시 지휘봉을 틀어쥐었다. 네 번째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악착같이 두 경기를 따라붙은 홍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밖에선 팬들의 환호가 말갛게 들렸다. 우승까지는 이제 한 걸음이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제사 겁이 난다. 십년을 짝사랑하고도 기어이 눈길을 주지 않은 승리의 여신이 여기서 그를 또 외면할까봐 무섭다. 아까 임요환이 내뱉은 수작질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귀에서 맴돈다. 우승자는 하늘이 낸다는 그 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입 안으로 그렇게 되뇌며 홍진호는 다시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휘영청 뽑아드는 검광의 뒤로, 오랜 세월 그를 기다려온 그의 저그가 도열하기 시작했다. 임진록의 마지막 전투는 막이 올랐다.

양 선수가 뽑아든 명검은 부딪히고 퉁겨 불꽃을 뿜었다. 그리고 전쟁은 절정에 올랐다.

"이 힘든 상황에서도!"

센터로 치고나오는 바이오닉의 대군을 목도하며 김태형은 탄식했다.

"이 힘든 상황에서도 병력을 모았습니다, 임요환! 정말 대단하달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예, 예, 이제 구름베슬도 모았고! SK테란으로서는 갖출 거 다 갖췄는데!"

뛰쳐나온 마린과 메딕들은 막막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그렇게 스컬지로 들이박았는데도 다시 모인 베슬은 강철의 구름이 되어 맵의 한켠을 뒤덮었다. 꿇릴 것이 없었다. 마린은 싸다. 계속 나온다. 밑도끝도없이 나온다. 그러나 저그가 가져간 가스멀티가 바야흐로 다섯!

"SK체제는 태생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울트라리스크가!"

홍진호의 울트라리스크 역시 미쳐서 쏟아진다. 불균형을 이룬 여분의 미네랄만큼은 저글링으로 돌아간다. 베슬의 마나가 채 차기도 전에 그만큼을 소모하고 다시 생산하는 일이 가능하다. 홍진호가 유리한 상황이다. 실수 없이 웅크리고만 있으면 테란은 말라죽는다.

이런 타이밍에 다른 선수들은 몸을 낮추고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죠, 홍진호라면!"

쿠웅! 탁자를 내리치며 엄재경은 고함쳤다.

"홍진호라면 이럴 때 달립니다!"

미니맵엔 거대한 세 줄기의 물결이 굽이쳤다. 디파일러를 동반한 홍진호의 전 병력이 테란의 멀티로 치받아 달리고 있었다. 마린들을 피하고 센터를 에둘러 달리는 대부대를 목격하고 임요환은 선뜩 소름이 돋았다. 테란은 회군하기 시작했다.

"일단 디파일러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다! 스웜 치면 끝장이에요!"
"베슬이 디파일러 찾습니다! 얼른 찾아야 합니다! 어서 찾아서, 이레디에이트!"

그런데 없다. 디파일러가 없다. 울트라리스크에 족족 이레디에이트를 꽂으면서도 임요환의 눈은 핏줄이 서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휘몰아치는 저그의 파도 속에는 분명히 디파일러가 섞여있을 일이다. 스웜이 뿌려지고 나면 끝장이다. 저 영리한 폭풍이 히드라까지 동반한 이상 커멘드를 띄워도 살아나지 못한다. 디파일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딨습니까!? 홍진호 선수, 디파일러 어딨습니까!? 설마 디파일러 두고 가나요!?"
"예, 예, 임요환 선수 이제는 늦었어요, 이제는! 이제는 설사 이레디에이트 걸어도!"

그리고 비로소 저글링이 테란의 멀티 안으로 돌입한 순간,

기지서부터 떠오던 오버로드로부터 디파일러가 내렸다.

그리고 스웜!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커멘드 앞에서 마린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멀티 셋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임요환은 대번에 눈을 찌푸렸다. 플라잉 디파일러였다. 본좌 마재윤이 몇 번인가 써먹었던 수작인데, 하여 또 이렇게 당하고야 만다.

테란의 자원 채취가 이윽고 멈춘다. 그리고―― 말간 침묵 속에서 황제는 지휘봉을 들었다.

차게 얼어붙은 그의 눈은 떨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다. 팔을 휘둘러 내려 그는 저편 워포그 너머를 가리켰다. 임요환의 병력이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임요환 선수! 그렇죠! 이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치고 나가야죠!"

끌고 나갔던 저그의 병력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들이 돌아오는 동안에 디파일러는 이레디에이트로 끊어먹을 수 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밀고 들어가서 사그리 날려버려야 한다, 바로 지금! 본진이든 멀티든 저그의 기지란 기지는 전부 뭉게버릴 수 있는 화력이 아직 남아있다!

"어디든 택하여, 확실하게!"

몰려드는 바이오닉 부대는 SK테란의 정수이자 황제 임요환의 근위군이었다. 육중한 가우스 라이플을 굳게 쥐고 그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뛰었다. 본진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디파일러에는 선물로 이레디에이트가 꽂혔다. 입구가 가까웠다.

"스웜 펼치기 전에 EMP 꽂아버리고! 그 즉시 쏜살같이 진입해야 합니다!"

절규하는 김태형의 말을 들었는지 일시에 베슬로부터 미사일이 날았다. 화면을 이지러뜨리며 퍼지는 충격파가 컨슘을 마친 디파일러의 마나를 일시에 날려버렸다.

아비규환의 혼란을 헤쳐 히드라 하나가 입구로 기어나왔다. 몸을 웅크린 히드라는 곧 에그로 변해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 위로 스웜이 펼쳐진다.

해설진은 뛰쳐일어났다.

"장판파!?"

부스 안에 든 임요환은, 기어이 설설 고개를 저으며 웃고 말았다.

홍진호는 웃지 않았다. 웃지 못했다. 칼을 뽑아든 그는 다시는 그 시퍼런 날을 칼집에 넣지 않을 작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짓밟은 테란의 멀티에서 돌아와 센터 아래에 군집한 그의 저그는, 이윽고 도열하여 몸을 낮췄다. 돌격의 진영을 갖추었다.

떨쳐 일어나려는 그의 저그 앞으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왔다.

"임요환이!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마지막 맵 '제국의 황혼'에서!"

그 아름다운 여신께옵선 금빛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네, 황제의 무덤이 되기에 이보다 더 멋진 전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한 손엔 월계관, 한 손엔 칼을 들고 그녀는 한 바퀴롤 돌아 설핏 웃었다.

"홍진호, 몰아칠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황제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보여주려고!"
"그렇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죠! 임요환이 잘했습니다, 다 잘했어요! 그런데!"

불어닥치는 폭풍의 일진광풍을 따라 니케의 머리칼은 길게 나부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십년간 자신을 짝사랑해온 그 재주 있는 남자에게, 무관의 제왕 홍진호에게 비로소 승리의 여신은 웃어주시었다. 포위당한 황제의 진영을 가리켜 칼을 휘둘러 겨누고 그녀는 어여쁜 목소리로 신탁을 속삭였다.

당신이 승리하리라고.

"하지만 우승자는 하늘이 내린단 말입니다!"

바야흐로 어휘를 희롱하는 엄재경의 창성을 가르며 폭풍이 몰아닥쳤다.

홍진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굳게 버티어 선 임요환의 대부대를 상대로 그의 병력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포효와 절규도 잦아들고, 전장에 가득 찼던 근위병들은 바닥에 누웠다. 홀로 남은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양 손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패배를 시인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기장을 가득 매웠던 팬들은 자리를 박찼다.

박수는 우레처럼 일었고 환호는 질풍처럼 휘몰아쳤다. 인파는 환희와 격정에 겨워 울먹이고 연거푸 그의 이름을 외쳤다. 홍진호를 부르짖었다. 십만 관중과 백만 시청자들은 젖은 눈으로 탄식과 경탄의 환성을 뱉었다. 온 스타판이 그의 한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 있고 귀 있는 자라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을 삼키고 부스 밖으로 나왔던 홍진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트로피를 보자마자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그에게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가 밀려들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그리고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불꽃처럼 뜨거운 눈물이 눈매에 맺혔다 떨어지고, 금빛 트로피 위에 아롱지어 맺혔다.

천명[天命]이 그에게 이 승리를 허락하기까지 십년. 팬들이 그의 우승을 기다리기까지 이렇게 흘러온 십년. 트로피를 들어올린 홍진호는 무대 아래서 환호하는 이들에게 젖은 눈으로 웃어보였다. 더 이상 준우승의 대명사로 불리지 않게 된 그의 위대한 이름은 담천을 배경으로 천리에 걸쳐져 아로새겨졌다.

박수. 환호. 열광. 그리고 다시 무궁토록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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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글을 베스트 게시판으로 보내주신 스타크래프트 게시판 여러분, 그리고 글을 재밌게 읽어주신 오늘의 유머 유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올드들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무궁토록 열광!


오유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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